'노벨상' 토마스 만의 '금지된 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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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명홍성광 번역가
- 인문
- 입력 2025.01.14 14:45
- 수정 2025.01.21 09:05
'노벨상' 토마스 만의 '금지된 사랑' 이야기
[홍성광의 독일 작가 사랑 이야기]
20세기의 '위대한 작가' 토마스 만
작품 곳곳에 억압된 '금지된 사랑'의 열망
결혼은 8세 연하 여성...이성애 승리?
아내도 남편 동성애에 病...마지막 사랑도
일기로 드러난 토마스 만의 동성애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은 괴테의 뒤를 잇는 20세기의 위대한 고전 작가이자 문명 비평가이다. 그는 건강한 삶의 세계를 동경하는 시민적 기질, 미와 정신세계를 희구하는 예술가적 기질간의 대립과 갈등, 조화를 문학적 과제로 삼아문학 활동을 했다. 그에게 삶의 세계와 예술의 세계사이의갈등은 은밀한 의미에서 이성애와 동성애 사이의 갈등을 의미하기도 했다.
토마스 만은 많은 작품에서 주목할 만한 성적 양면성과 동성애적 사랑을 보여준다. 편지와 일기를 보면, 동성애를 다룬 토마스 만의 작품이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토마스 만은 에세이 「결혼에 관하여」에서 동성애를 ‘생식 불능, 무가망성, 무결과, 무책임이라는 의미에서의 자유로운 사랑’이라고 칭했다.동성애에 대한 토마스 만의 은밀한 관심은 ‘금지된 사랑’의 형태로나타났다.
토마스 만의 삶과 작품 간의 관계는 그의 일기 출판을 통해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의 일기는 취리히의 토마스 만 기록보관소에 밀봉된 채 보관되다가 그가 죽은 지 20년 되던 날인 1975년 8월 12일에 개봉되어 1977년부터 1995년까지 총 10권으로 출간되었다. 봉인 해제된 글에 의하면, 그는 20대 후반까지 동성애자였으며 평생 동안 남성에게 강렬한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토마스 만 작품 해석을 바꾼 일기장
토마스 만의 일기에는 성에 대한 그의 투쟁이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중 젊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인상주의 화가인 파울 에렌베르크(Paul Ehrenberg, 1876∼1949)에 대한 감정을 ‘내 마음의 중심 경험’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만은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인 그와 함께 종종 실내악을 연주했다. 편지와 일기에 따르면, 만은 에렌베르크에게 열광했고, 1899년부터 1903년까지 격렬한 관계를 맺었다. 장편 『파우스트 박사』에서 바이올리니스트 루돌프 슈베르트페거의 모델이 바로 에렌베르크다.
토마스 만은 일평생 일기를 썼지만 아쉽게도 모두 보존되어 있지는 않고, 1918년에서 1921년까지의 일기와 1933년에서 1955년까지의 일기만 볼 수있다. 이미 1896년 뮌헨에서 그때까지 쓴 일기를 불태웠는데 이는 자신의 은밀한 성향을 감추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비밀을 감추려 했다면 일기를 다 불태워야 할텐데 일부를남겨둔 것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사후에 자신의 은밀한 삶에 대해 올바로 알기를 원한 것은 아닐까.
사후 40년, 일기 공개후 20년이 지난 1990년대 중반에 들어 그의 전기가 여러 권 나왔는데, 마침내 신화적인 껍질을 벗고 속화되었으며 남다른 성적 취향과 함께 인간적인 면모가 부각되었다. 그리하여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주인공 아셴바흐 같은 근엄한 고전 작가의 이미지가 사라지는 한편,쉽게 상처받고 성적 이중성에 고통받으며 희망 없는 짝사랑에 시달리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그로써 그는 위신과 장엄함은 잃었지만, 그 대신 진실성과 인간적인 면모를 얻게 되었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 폰 플라텐의 시구 “세상이 나를 알고 그래서 용서해 주기를 바란다”는 말은 토마스 만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이처럼 말 못할 고통을 지닌 그는 감쪽같이 자신을 위장했기에안데르센과 그의 동화처럼 '미운 오리새끼'가 되지 않고 평생 위엄과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면의 고통과 죄의식, 수치감까지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일기공개로 그의작품 해석도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고백과 위장 사이의 진실이 파헤쳐졌고, 은밀한 동성애가 그의 삶과 작품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그는 평생 동성애에 대한 저항과 타협, 거리와 매혹 사이에서 끝없는 '진자 운동'을 했다. 일기는 그의 삶과 작품 해석을 위한 새로운 열쇠가 되어주었고, 그의 소설들을 심층 분석할 수 있게 됨으로써 토마스 만이 모더니스트로 재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작품 곳곳에 등장한 동성애적 사랑들
토마스 만의 동성애대상들은 그의 문학 작품에서영원한 생명을 얻었다.아르민 마르텐스는 『토니오 크뢰거』(1903)에서 '한스 한젠'으로, 빌리 팀페는 『마의 산』(1924)에서 '프리비슬라프 히페'로, 파울 에렌베르크는 『파우스트 박사』(1947)에서 오르가니스트 '슈베르트페거'로 등장한다. 또한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주인공 아셴바흐는 은밀한 의미에서 토마스 만의 '문학적 자아'다.
예술가와 시민으로서의 갈등을 다룬 소설 『토니오 크뢰거』에서 14세영사의 아들 토니오 크뢰거는 동급생 한스 한젠에게 반해있다. 16세가 되자 토니오는 잉에를 사랑하게 되지만, 이는 토마스 만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은폐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한스 한젠의 실제 모델은 1906년 젊은 나이로 사망한 토마스 만의 급우 아르민 마르텐스이다. 1889∼90년 겨울에 만이 사랑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열망에 가득 찬 토마스 만은 아르민에게 많은 시를 썼고, 나중에 그에 대해 부끄러워했다. 만의 첫 단편과 시 중 일부가 아르민에게 헌정되었는데, 1955년 토마만이 죽기 몇 달 전에그 첫사랑을 잊을 수 없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1905년 카타리나(애칭은 카티아) 프링스하임(Katharina Pringsheim, 1883∼1980)과결혼한 토마스 만은 억압된 동성애적 욕망을 현실이 아닌 작품 속에서 잇따라 표출했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은 장기간 성적 욕망과 에로티즘을 억압하다가 이것에 좌절로 끝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주인공인 고전 작가 아셴바흐는 베네치아로의 여행과 그곳에서의 체류 중 일련의 기묘한 낯선 남자들을 만난다. 이들은 베네치아로 가는 배 안에서 만나는젊은이로 변장한 늙은이, 곤돌라 사공, 아셴바흐가 묵는 호텔 정원에서 공연하는 유랑 가수 등이다. 죽음을 연상시키고 이국적인 면모를 지닌 이들은 동성애 코드와 연결된다.
아셴바흐가 좇아다니는 타치오는 그리스 조각을 연상시키는 미소년으로,저승으로 이끄는 ‘영혼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 오염된 딸기를 먹고 죽기 직전인 아셴바흐는 모래톱 위를 걸어가는 미소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죽음을 맞는다.죽음과 미의 연관성을 설명하기 위해 토마스 만은 ‘아름다움을 눈으로 바라본 자는 이미 죽음의 처분에 맡겨져 있다’는 플라텐의 시 「트리스탄」의 첫 구절을 인용한다. 이 내용이야말로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요약이라 볼 수 있다.
소설 『마의 산』에 나타난 동성애
『마의 산』의 주인공 카스토르프 역시 동성애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어린 시절 학우 프리비슬라프 히페를 짝사랑하고, 남성적인 페퍼코른에게 매혹되는 것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심지어 사촌인 요아힘, 계몽주의자 세템브리니와 그의 관계에서도 은밀한 동성애적 애착이 숨겨져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가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쇼샤의 눈과 목소리는 동급생 히페를 떠올리게 한다. 카스토르프가 히페와 쇼샤한테서 연필 빌리는 행위를 통해 히페와 쇼샤도서로 연결된다.쇼샤에 대해 소년 같은 외모, 작은 가슴, 좁은 골반 등중성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고묘사한다. 쇼샤에 대한 카스토르프의 사랑이 ‘비이성적’이고 ‘생식불능적’이며 ‘금지된 사랑’인 이유는, 그것이 은밀한 차원에서는 동성애이기 때문이다.
토마스 만의 부인 카티아 역시 남성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쇼사와도 연결된다. 만은 부인 카티아가 자전거를 타고, 운전을 하며, 대학 공부를 하고 남성적인 지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자유롭고 해방된 여성의 특성을 지녔다고 말했다.
그는 1929년에 행한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성인이 '성 세바스찬'이라고 밝혔다. 통설에 의하면 '성 세바스찬'은 디오클레티안 로마황제의 동성애 파트너였다고 전해진다. 르네상스 미술에서 몸에 화살이 찔린 채 참으며 서 있는 모습으로 구현되는 '성 세바스찬'의 모습은 동성애와 죽음의 결합을 보여주는 것이다.
『토니오 크뢰거』의 마지막 대목에서 주인공토니오는 ‘밝고 생기에 넘치며 행복한 사람들, 사랑스럽고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돌아선다. 그것은 불임의 사랑이 아니라 유익하고 결실을 맺는 사랑을 의미한다. 아울러 토마스 만도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떨치고 카티아와결혼하게 된다. 전기적으로 말하자면, 결혼은 파울 에렌베르크에서 카타리나프링스하임으로 가는 길이었다.
동성애에 대한 이성애의 승리
갓 스무 살의 카티아는 그에게 별로 열정적이지 않고 시큰둥했다.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살아온 그녀에게는 학업, 형제, 테니스 클럽활동 등 모든 것에서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러니 서둘러 결혼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반면, 지적이고 도도한 카티아를 보고 사랑에 빠진 토마스 만이 오랫동안 주저하다가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구혼한다. 이때도 카티아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긴 마찬가지였다.카티아의 아버지 프랑스하임 교수 역시 젊지만 유명작가의 구혼이 달갑잖았다. 그는 사랑하는 딸과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카티아는 토마스 만의 정열적인 구혼에 오랫동안 버티다가 결국 넘어가고 말았다. 만은 카티아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순수하게 외골수의 실존을 영위하며 오로지 예술가로서만 주목받기를 원했다"고 썼다. 그러면서 그녀를 ‘현명하고, 달콤하고, 착하고, 사랑스러운 나의 왕비님’이라고 부르고, 그녀를 ‘나의 긍정이자 정당성이며 나의 완성’이라며 ‘나의 구원자이자 나의 아내’라고 찬사를 쏟아냈다.
토마스 만의 사랑의 대상이 에렌부르크에서 카티아로 넘어감으로써 표면적으로는 동성애에 맞서 이성애가 승리를 거둔 셈이 됐다. 그렇지만 그 승리는 완벽하지 않았다.

결혼한 지 7년후 1912년 초여름 토마스 만은 다보스의 요양소에서 치료 중이던 부인을 방문해 3주 동안 그곳에서 머물렀고, 그곳에서 장편 『마의 산』의 영감을 얻기도 했다. 처음에는 결핵으로 의심됐지만, 의사는 부인 카티아의 정확한 병명을 찾지 못한 채 막연히 '심신 관련한 병'이라 했다. 카티아 본인의 말로는‘모든 것을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해져서 몇 달 후 그곳을 떠나왔다. '마음의 병', 아마도 남편의 성적 정체성을 알고 혼자 끙끙 앓으면서 괴로워하다가 생긴 병으로 추정된다.
마지막 사랑, 프란츠 베스터마이어
토마스 만이 세상을 떠나기 5년 전, 1950년 4월 말부터 8월 말까지 토마스 만은 카티아와 함께 유럽 전역을 도는 강연 여행을 다녔다. 그는 취리히의 한 호텔 웨이터인 프란츠 베스터마이어를 보고 또사랑에 빠진다. 그는 줄곧 그 만을 생각하며 만남의 기회를 가지려고 시도했다. 25년 전 이래로 없던 일이 75세 노인에게 또 일어난 것이다. 그는 취리히를 떠나기 전 슬픔에 가득 차서 일기에 기록을 남긴다.
“세상의 명성은 내게 전혀 무가치하다. 더구나 프란츠의 미소 한번, 그의 시선,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비하면 명성이란 얼마나 무가치한가!”
다음날 일기에도이렇게 적었다.
“사랑하는 사람(프란츠)을 생각하며 잠이 들었고, 그를 생각하며 잠에서 깬다. ‘우리가 여전히 사랑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떠나기 전날 밤, 이렇게 적고 있다.
“영원히 안녕, 매혹적인 그대여, 고통스럽게 가슴을 파고드는 뒤늦은 사랑의 꿈이여! 나는 얼마간 더 살고, 얼마간 더 일하고, 그 뒤엔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도 그대의 심오한 인생행로에서 성숙해지고, 그런 뒤 언젠가는 저 세상으로 갈 것이다. 오, 사랑 속에서 스스로를 긍정하는 불가해한 삶이여!”

동성애와 유미주의
토마스 만은 동성애에 대해 상반된 감정을 지녔다. 선천적인 동성애적 성향을 명확히 인식하면서도 동성애의 ‘비도덕성’도 확신했다. 그는앙드레 지드와 아들 클라우스를 비롯한 공공연한 동성 연애자들과는 달리,자신의 남다른 성향에 대해 많이 고민했고평생 이를 숨기려 했다.
그는 자신의 비이성적이고 비도덕적인 성향을 밝히지 않고, 현실에서는 자신의 비밀인 동성애적 욕망을 억누르면서 창작 활동을 통해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과 죽음에 대한 공감을 펼쳐보이려 했다. 그리고 이를 에로틱한 유미주의로 승화시켜 작품 창작의 원동력이자 자극으로 삼으면서 구원을 모색했다.
고통으로 가득 찬 동경이야말로 토마스 만에게는 문학 창작의 원동력이었다.그에게 문학은 현실에서 억압된 성적 충동을 시적으로 변용된 형태로 충족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동성애 테마는 작품 속에서 변용되어 보수적·금욕적으로 다루어진다. 동성애는 근친상간처럼 사랑을 위한 사랑으로서 사랑의 유미주의(唯美主義: 예술은 아름다움 자체를 위해서존재한다는 '예술지상주의'-편집자주)예술을 상징한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 주인공 아셴바흐는 타치오를 만져보기는커녕 말조차 걸어보지 못한다. 성적 욕망과 자기 규율 사이의 갈등은 토마스 만 작품 세계의 중요한 창작 미학적 원칙을 이루고 있다.

※ 홍성광은 서울대 독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독문학박사로, 독일 문학 및 철학 관련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독일 명작 기행』, 『글 읽기와 길 잃기』, 역서로 루카치의 『영혼과 형식』,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 니체의 『비극의 탄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 토마스 만의 정치 에세이 『예술과 정치』, 『마의 산』(상·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상·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외』,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젊은 베르터의 고뇌』, 실러의 『도적들』,『간계와 사랑·빌헬름 텔』, 헤세의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 『싯다르타』, 카프카의 『성』,『소송』,『변신 외』,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총론』(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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